전승자 손끝으로 되살아나는 조선 왕실의 품격
작성일 : 2025.10.23 22:35
작성자 : 문화부
“이 부분의 길이를 알 수 있을까요?” “한 번 재볼까요? 7.8cm네요.”

23일 오전, 서울 종로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1층 열린 수장고. 청석(靑舃)을 마주한 황덕성 화혜장 이수자의 손끝이 분주했다. 눈앞에 놓인 유물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1920년대 중반 공식 예복 ‘적의’에 맞춰 신었던 예식용 신발이다.
황 이수자는 아내 김란희 씨와 함께 유물을 살피며 치수를 재고 사진을 남겼다. 진열장 너머로만 바라보던 유물과의 직면. 이는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장인들이 전통의 실마리를 되찾는 고증의 시간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올해부터 국가무형유산 전승자를 위한 ‘왕실 유산 심층 조사’를 기획했다. 유물의 실물에 직접 접근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전통기술의 정밀 복원과 창작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이다.
상반기에는 침선장, 자수장, 누비장 등이 참여했고, 하반기에는 화혜장·매듭장·탕건장·옥장 등 공예 분야 장인들이 현장을 찾았다.
이날 현장에 참석한 김경희 탕건장 전승교육사는 제주에서 올라왔다. 그는 “‘와룡관이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며 “2년 전 처음 유물을 접했을 땐 엄두도 안 났지만, 이번엔 치수도 재고 구조도 분석했다. 직접 재현해보고 싶다”며 웃었다.
탕건은 갓 아래 받쳐 쓰는 전통 남성용 관모다. 지금은 보기 드문 이 유산의 명맥은 김 전승교육사 집안에서 3대째 이어지고 있다.
매듭장 전승교육사 박선경 씨와 이수자 박선희 씨 자매는 영친왕비의 백옥쌍룡단작노리개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박물관 측과 함께 끈목의 두께, 염색, 구조를 정밀 촬영하며 분석을 이어갔다.
“완벽한 복원은 쉽지 않지만, 고증을 거듭하면 원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박 전승교육사의 목소리엔 책임감이 실렸다. 그들의 가문은 초대 매듭장 보유자인 외조부 정연수, 외조모 최은순, 모친 정봉섭 보유자까지 3대를 이어온 매듭 명가다.
화혜장 황덕성 이수자 역시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아내 김란희 씨도 함께 기술을 배우며 전통을 공동으로 이어간다.
“과거에는 염색, 매듭, 재봉 등이 분업화돼 있었지만, 오늘날엔 가족 단위로 전통을 지켜나가는 사례가 많아졌습니다.” 박선경 씨는 그렇게 말하며, 그 책임을 ‘무게감 있는 유산’이라 표현했다.
김경희 전승교육사도 “10대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 어느덧 삶이 됐다”며 “책임감, 사명감으로 오늘도 손을 놀린다”고 말했다.
왕실의 예복, 관모, 장신구 속에 깃든 조선의 미감. 그것을 오늘날 다시 꺼내 살펴보는 손길은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내일을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고궁박물관의 수장고는 오늘, 그 장인들에게 숙제를 내줬다. 그리고 답은 지금, 그들의 손끝에서 천천히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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